푸른청춘
페이지 정보
작성자 HELLO 작성일25-09-17 23:07 조회1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글을 대구출장마사지 올리는 이유
하늘님의 배려로 사랑방 토방에서 봄볕에 잠깐 졸다 깨어보니, 나의 인생이 속절없이 지나가 버렸다. 폭염도 사랑했어야 했는데 상처만 받았으니...,여생의 끝자락을 놓아버리기 전에 잠깐이나마 나의 화양년화인 청춘시절을 되뇌이고 싶었다.
혼란의 시간
그날은 3월의 어느 따뜻한 봄날이었다. 동네의 부역일이 있어서 집집마다 한사람씩 나와서 겨우내 훼손된 동네의 주요도로를 닦는날이다, 내 동네는 서해안 인근의 작은 농촌마을로 전체 15가구가 멀리 뛰엄뛰엄 촌락을 이루며 살고 있다. 길을 닦으며 오손도손 가족 이야기를 하고 있을때에 인근 지서의 순경2명이 다가와 "하정초"를 찾는다.
하정초는 순경을 따라 지서로 가고, 금방 작은 동네에서는 갖가지 소문이 퍼진다. 서울로 공부하러 가서 무슨 데모를 했느니? 무슨 죄를 저지렀는니? 의혹이 재미삼아 거짖을 보태어 더욱 확산된다. 하정초의 부모는 부끄럽다 하여 두문불출 한다.
사실 정초는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고생하며 중악교를 다니고,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학에는 꿈도꾸지 못했고 또한 거주할 만한 어떤곳도 없었기에 마음속에 또하나의 분노를 잉태하고 있었다, 그래도 너무 억울해서 시험 응시, K대에 합격했다, 등록금도 거주처도 없으니.... 까짖 내년에 국립대로 가면 등록금은 해결되리라 생각하고 재수를 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때에 신체검사 통지를 받았지만 2회에 걸쳐 응하지 않했다.더 노력해서 입시에 응해야 할텐데 신검을 대구출장마사지 받으면 모두 꽝이된다. 2차례나 응하지 않다가 대학에 입학후 한달만에 징집 당하게 되었다. 자수후 신검, 입영이 2개월만에 결정된 것이다.
훈련소 시간들..두려움을 안고서...
신검도 내고향의 군청이 아닌 병역기피자 단체로 타지방에서 신검후 대전 근방의 예비사단으로 입영하게 되었다.너무 긴박하게 입영한 정초는 또한번 놀라게 되었다. 내무반이 25명씩 2줄로 50명이 함께 생활하게 되었는데 인근의 시군출신 기피지들의 자수기간내의 장정들로 지인은 전혀 없었다, 대부분 같은 시군출신으로 학교동창들도 있다고 들었는데.....
나의 내무반 번호는 46번이었는데....동기들이 나이많은 사람들이 많았고 내 번호뒤 앞뒤 50번까지는 34세까지, 거의 다 30세가 넘는 자칭 영감들이었다. 내무반의 수월한 통제가 어렵지만 세대차이로 재미난 세상을 경험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일과시간에는 규정에 의한 훈련이지만 늦게온 원죄로 "기피자놈들"이란 프레임에 내내 요주의에 기압받는 훈병이 되고 있었다.
정규 훈련외 대형창고에서 '소지한 돈은 맡겨야한다'며 강압적인 명령, 그리고 굴리기 기압등이 공포스러워 개중에는 얼마의돈을 창고빈틈, 땅바닥등에 꼬불치는사람, 구르다가 잃는사람등 적지않은 비상금이 유출되고, 편하게 기간병들은 짭잘한 부수입을 올렸을 것이다. 나야 가지고간 돈이 없으니까....
일과후에는 정신교육(기압)을 받던지 부대내의 토끼장 공사에 투입되기도했다(토끼굴을 여러군데 뚫고 토끼를 키우는곳),또한 내무반에 '순이'라고 이름지워진 강아지와 함께 지냈다, 내무반 전체 기압때는 침상밑으로 '대가리박어'도 자주있는데 그때 강아지똥으로 온몸을 맛사지하던 대구출장마사지 때도 있었지....
빵을 화장실에서 먹는놈, 옆의 동기 보급품 훔치던놈, 노래 잘하던놈, 그런데 내뒤의 5명은 30살이 넘는 참하게 대학교육을 받던놈들이었는데 아마도 지독한 데모꾼(학생운동)이었을 것이다, 나는 32살의 산도적같은 Y대퇴생 Um과 친하게 형이라 부르며 지냈다.그게 인연이 되어 군생활 내내 함께하게 되었다.김치반찬 하나,국,그리고 보리넣은 밥으로 식사량은 늘 부족했다, 언제가 식사 당번일 때에 국통을 들고 오다가 통속에 있는 돼지고기 비계 덩어리가 먹고싶어서, 뜨거운것을 입에넣고 오물거렸던 생각도 난다.
6주간의 기본훈련을 마치고 배출하던 날이다, 고단했지만 잘견디고 늘 불만이던 생각도 긍정으로 바뀌었고 단단하게 단련되고 무장되어서 모두들 대견스레 생각했으리라... 서로 향후 군생활 잘하기를 기원하며 그룹단위로 배치받아 대전발0시50분 열차를 타러 트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우리들10여명은 대전의 통신학교 근처의 QM 학교로 전출되었다.
후반기 교육기간
QM학교는 군의 보급품을 관리하는 주특기 학교다, 해병대등 타군도 있었으며 장교반,하사관반,사병반등으로 구성된 교육기간과 교육과정이 각기 달랐다. 매일 훈련도 없고 총기수입도 없고, 매일밤 주보에서 물반 술반인 막걸리도 마실수가 있어 별천지 군대라고 자찬하며 점차 군생활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내 뒷번호 5명은 그대로이고 내 번호 앞으로 우리나라 유명한 오페라 가수의 아들이 왔다, 학과시간에 책을끼고 교육장으로 가는 모습이 대학생활의 연속같이 활기차고 자유로웠다, 우리의 교육과정은 6주간 사단급이상의 보급을 대구출장마사지 담당하는 761주특기 교육이며 주로 ICG(재물통제단)로 부터 보급품을 청구,불출하는 것을 최초로 컴퓨터 처리로 교육받고 있었다, 꿈같은 시간은 흘렀다.
교육이 끝나고 일등병으로 진급된다, PX에서 훈련생 의 모자를 내던지고 기간병 모자에 일등병 계급장을 붙이니 세상이 다 내세상 같았다, 그리고 대전역으로 동기들이 군용트럭에 오르려 눈물어린 작별의 시간이 되었다, 모두들 몸조심하고 병역의 의무를 마치라.
다들 떠난후 우리 5명만 늦게까지 대기하다가 드디어 대전역으로 가서 군용열차에 오르게 되었다, 어느곳 어느부대로 가는줄도 모르고 인솔자만 따라서....
용산역에 도착하니 갖 훈련을 끝냈거나 후반기 교육을 끝낸 병사들로 매우 혼잡했다, 잔국의 부대(자대)로 전입되어가는 병사들로 얼굴에는 미지의 세상으로 끌려가는듯 두려운 빛이 가득했다. 우리는 전국의 훈련소에서 온 병사들과 같은 버스에 오르면서 이제서야 어디로 가는지 알게 되었다.
훈련소에서 지급받은 더불백을 메고 버스에 오르니, 우리 훈련소 동기 5명만 기간병 모자에 일등병이다, 모두들 훈련소 빵모자에 이등병이고 모두들 우리를 기간병으로 착각하며 가끔은 인사까지도 한다. 우리거 도착한곳은 고양군 서오릉 근처의 보안교육기관이었다. 여기도 QM과 같이 장교,하사관,병의 교육이고 기간,과정도 각각 다르게 편성되어 있었다.
4주간의 교육으로 동기들은 끗발이니 뭐니 하면서 상당히 긍지를 갖는다, 하지만 나는 학교시절 미행등 안좋은 기억때문에 진절머리가 나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 대구출장마사지 이었다, 입소 첫날 신고때부터 놀림과 차별(?)을 받았다, "이미 타 부대로 전속되어 갔을 놈들이 무슨 빽으로 교육기관에 왔느냐고"...
같이 입소한 사병교육생은 전부 훈련소에서 막 전출된 이등병인데 우리 5명은 이미 후반기 교육과 일등병으로 진급되었기 때문이다.이곳에는 유명하신 TK준위님이 계셨다, 원칙과 엄격함이 나는 좋았지만.... 그분한테 우리5명이 이곳에 온 경위를 알게 되었다. 함께 훈련소,QM학교,MS교육 동기생인 Um일병의 숙부가 높은 장군이었다고 한다, 갑자기 행불된 조카가 QM학교에 교육중이라는것을 늦게 알고서 끗발로 조치했다고 했는데 우리 4명은 덤으로 딸려오게된 것이라고 했다.
자대로 향하며
4주간의 교육의 기본은 좋았고 MS교육환경도 재미있는 추억이었다, 단, 나는 이런 주특기는 질색이다, 어린시절이나 학교 생활에서 느껴 늦게 형성된 DNA 때문일것이다. 원래대로 761이나 100이었으면 좋았으련만.... 수료식후 전국의 부대로 전출명령이 하달되어 동기끼리 안전 군생활을 주문하며 작별을 고한다, 울컥하면서.....
이제부터 우리 훈련소 동기 5명도 각자 헤어지게 되고 하사관등 10여명이 전출명령서를 받아 1박하고 다음날 서울역에서 만나기로했다. 명령서는 하사관이 대표로 받았고 전출부대는 부산의 삼*공사 였다. 전입신고시간이 17시까지로 충분히 계산하여 막걸리 한잔 곁들여 식사하고 부산행 열차로 내려갔다.
아뿔사! 큰사고가 발생했다, 해운대 TMO에서 부대주소를 묻기위해 갔는데.... 명령지에는 분명 대구의 일명 태*공사였더라... 대표가 잘못 판단했던 것이다. 부산 대구출장마사지 부대에 전화연결, 그대로 부산으로 귀대하란다. 집을 제대로 못찾은 것이다, 대표가 명령지를 대략 보았고 미리 판단했기 때문이다, 부산 부대의 기간병들로 부터 조롱당하고 다음날 아침, 연락병을 따라 대구의 부대에 도착했다.
아예 이곳에서는 하사관은 제외시키고 병들에게만 조롱과 갖은 체벌을 가했다. 대구 부대는 시내에 있는 적산가옥으로 3층 건물과 부속건물, 넓은 공터가 있었는데.... 우리는 지하방에서 소등한체로 두눈을 가리고 묶여있었다, 또한 팔에 주사기를 꼿았는지 따끔했으며 철렁! 철렁!하고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거 들렸다, 정신상태를 시험하기 위한 가짜 피뽑기 체벌이었는데 2사람이 속아서 정신을 잃을뻔도 했었지.....
자대생활
우리 부대의 부대장은 권** 중령으로 거의 서울에 있었으며 곧 승진후 국회의원까지 하신 분이다, 내무반은 부서단위로 조직되었으며 부대원 대부분이 대구와 인근이었고 타시도 출신은 소수인원이었다, 사투리를 알아듯지 못해 늘 명청하단소리를 들었고,그래서 따돌림 당하는 느낌이었고 고단한 내무생활의 연속이었다. 별것도 아닌데 끗발있는 부대라고 자존감을 높이고.... 내 체질에는 전혀 맞지 않았다.
내 업무는 조사업무 보조로 일과중에는 부서장의 통제를, 그리고 업무후에는 고참들의 지배(?)를 받는 극히 군대다운 곳이다, 견딜만하고 전역일을 기다릴만도 하다, 저녁에는 언제든지 보고하고 목욕을 다녀올수도 있고 주말에는 시내 외출에도 제약은 없다.하지만 내무생활만은 힘겹고 짜증이 났다,
가끔은 인근의 K비행장에 가서 팬텀기의 이착륙을 대구출장마사지 보면서 불기둥같은 젊음을 느꼈고, 간부들의 심부름꾼으로 주말밤에 저수지 낚시갔던 때도 많았다, 나는 그때에 낚시취미를 가졌는지 모른다, 업무후에는 가끔 간부들의 공돌이가 되어 테니스를 즐길때도 있었다. 또한 군사령부에 출장가서 "낙동강 수계관찰병"들의 근무담도 즐겨들었다. 옛이야기가 되었지만 그때는 낙동강 발원지 부터 부산까지 홍수에 대비, 3명으로 구성된 수개의 관찰 근무조가 있었다.
무료한 주말에 외출 나오면 갈곳이 없었다, 그래서 즐겨찾던 곳이 부대근처의 계산성당길, 청라언덕길,SM여학교길의 다방과 선술집에서 서성거렸지... 성당에서 미사도 참석하고 배회도 많이 했다, 특히 봄이오면 목련꽃과 벗꽃이 흐느러지게 피었었지, 얼큰히 붉은 얼굴로 '청라언덕 위에 백합필척에" 의 사우 와 "목련꽃 그늘아래서"의 4월의노래를 목청껏 부른적도 있었지.....
이육사의 시를 되뇌이며 SM학교담을 따라가고, 달성공원의 "상화의 시비, 마돈나 밤이 주는꿈'을 눈의 초점없이 바라보았고 동물원의 아기 코키리의 애교가 눈에 선하다, 언젠가 뉴스에 그때의 코키리가 지금까지 살아있다고 하던데...군 생활을 하면서 나는 두번만 집에 다녀왔다, 내가 어렸을 때에 12살 위인 형님이 매주말 집에와서 돈 달라고 부모님 괴롭히던 것을 보았고 어린 마음이지만 그때에 "나는 군에 가면 절대 집에 오지않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어느 대위님, 우리 부서 문관인 타이피스트 여직원을 따라다니던 생각이 난다, 너무 짖궂게 해서 힘들다고 대구출장마사지 사병인 내게 하소연 하던적도 있었지만 낸들 어쩌랴... 영어를 전혀 배운적 없는 우리 인사계님(상사), 용기내어 내게 개인교습을 비밀리에 부탁.... 저녁에 2~3시간씩 자택에 초빙(?)되어 가르치기도 했다, 교재가 Tom and Judy 였는데 1년동안에 3년과정을 마스터했지... 머리가 좋아서 습득이 수월했는데... 가정 형평상 배울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지... 정성들여 가르첬고 열심히 배운덕분에 기초적인 영어는 마스터 하게 되었다고 전역하는날 까지도 고마움을 표했었지... 그리고 싸인도 멋지게 만들어 선물했는데...지금껏 생존해 계시면 사용하시리라....
어느덧 세월은 흐르고 전역날이 다가왔다, 동기생 청주의 봉가놈하고 대전까지 함께와서 마지막 1박을 여관에서 추억쌓고, 다음날 각자 고향의 부모님앞으로 떠나게 되었다. 육영수여사의 총격사망,전방 미루나무 사건, 월남패망등 굵직한 군사고를 현장에서 목격하고 군문을 나와보니 내가 근무했던 부대장이 높은 정치인이 되고 상급 부대장은 대통령이 되는것도 보았다
군문을 나서서
내가 나이 한살 먹으매 그때는 존재감 조차 없었는데 ,나도 국가에 헌신한 적도 있었구나 하며 자긍심도 가질때가 있다, 무엇보다도 봄볕처럼 지나간 50 여년전 나의 푸른청춘이 너무 그리워진다, 동기들중에는 사장도 있고 언론사 사장도 되었으니....얼마전까지 연락이 되었던 마지막 동기인 봉병장이 소식이 끊겼다,제발 별일 없기를 소망한다. 대한민국의 푸른청춘들!! 세상을 원망하지 말자, This too shall pass away! 화이팅!!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